책 만들 때 중요했던 건 프로덕트 만들 때도 중요하더라
· 편리한 정보의 흐름과 구조 만들기
· 정확하고 알기 쉬운 라이팅
· 편리한 정보의 흐름과 구조 만들기
· 정확하고 알기 쉬운 라이팅
미국에서 디자인 대학원을 다닐 때 나의 지도교수는 물리학과를 졸업고 RISD대학원에서 최종 학위를 받았다. 중고등학교 때부터 입시 미술을 준비해 대학에 가는 한국과 달리, 학부 때는 디자인 전공이 아니었던 교수들과 동료들이 꽤 많았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아, 제가 비전공자라서...'라는 말은 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한국에 오니 '비전공자시네요?', '이전에는 전혀 다른 일 하셨었네요?'라는 질문을 자주 들었다.
그러나!
이게 전혀 다른 일은 아니더란 말이지.
나는 실용서를 기획하고 편집하는 에디터였다. 실용서에는 소설이나 에세이처럼 흰 종이에 까만 글씨만 나오지 않는다. 무슨 뜻이냐면, 눈 앞에 요리, 여행, 수험서 같은 책이 있다면 펼쳐보시길. 실용서에는 사진과 일러스트는 기본이요, 때론 숫자와 도표, 때론 제 2의 외국어, 어떤 경우엔 지도, 다양한 사이즈의 텍스트...여러가지 복잡한 정보가 각자의 구조와 특징을 가지고 한 권에 담겨있다.
이게 전혀 다른 일은 아니더란 말이지.
나는 실용서를 기획하고 편집하는 에디터였다. 실용서에는 소설이나 에세이처럼 흰 종이에 까만 글씨만 나오지 않는다. 무슨 뜻이냐면, 눈 앞에 요리, 여행, 수험서 같은 책이 있다면 펼쳐보시길. 실용서에는 사진과 일러스트는 기본이요, 때론 숫자와 도표, 때론 제 2의 외국어, 어떤 경우엔 지도, 다양한 사이즈의 텍스트...여러가지 복잡한 정보가 각자의 구조와 특징을 가지고 한 권에 담겨있다.
어쩔 수 없이 실용서 에디터들의 업무는 폭 넓고 다양할 수밖에 없다. UXUI를 접하면서 책을 만들던 일이, 프로덕트 디자이너가 되기 위한 기초 훈련이었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다른 분야가 아닌, 실용서를 만들었던 경험이 프로덕트 디자인에 도움이 되는 것들을 정리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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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리한 정보의 흐름과 구조 만들기
소설은 원고가 완성돼서 디자이너에게 텍스트를 넘기면 며칠 만에도 디자인 파일이 완성되기도 한다고 들었다. 그런데, 실용서는 조금 다르다. 일단, 어떤 정보를 어떤 흐름으로 전달할지를 정해야 작가가 원고를 쓸 수 있다.
예를 들어 '부산 여행' 책을 만든다고 하자. 부산을 몇 가지 세부 구역으로 구분하고 다시 그 안에서 맛집, 숙박, 즐길 거리 등의 정보를 소개할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일반적으로 책을 만드는 경우는 없다. 최소한 '뚜벅이 여행자를 위한 부산 맛집' 책 정도는 되어야 한다.
그러면 뚜벅이 여행자에게 어떤 정보를 어떻게 전달해야 편리할까? 맛집과 관련된 어떤 정보를, 어떤 순서로 포함시켜야 할까? 사진은 외관? 내부? 뚜벅이니까 버스 정류장 기준으로 위치를 설명할까? 모든 장소는 반 페이지 분량으로 통일하기로 했는데 어떤 정보를 어디까지 자르지? 텍스트 분량이 안맞는데 아이콘으로 통일할까? (지도는 어느 크기로 만들어 어느 위치에 넣지? 커다란 지도 한 장을 각 챕터 앞에? 그러면 계속 지도를 확인하기 위해 앞 페이지로 돌아가는 게 불편하지 않을까? 라는 고민도...)
이렇듯 실용서를 만들 때 '이 정보들을 어떻게 구성해야 독자가 편리할까?'라는 고민을 달고 살았다. 그러다보니 디자이너보다는 에디터가 레퍼런스를 찾고 직접 레이아웃을 그리는 경우도 다반사다. 이런 과정은 IA를 그리는 것과 비슷할 때도 있고 전체 유저 플로우를 기획하는 것과도 유사한 것 같다. 종종 카드 UI를 만드는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정확하고 알기 쉬운 라이팅
아주 큰 회사가 아니고서야 프로덕트 디자이너들이 UX라이팅을 맡는 게 일반적이다. 그리고 나에겐 UX라이팅을 할 때가 실용서를 만들던 경험으로부터 가장 도움을 많이 받는 순간이기도 하다.
에세이는 본문의 좋은 문장에서 제목을 찾아 활용하는 편이라고 한다. 독자들은 알 수 없는 제목에 묘한 매력을 느껴 '대체 어떤 내용의 책일까?'라며 책을 펼치게 되고. 하지만! 실용서의 제목은 정확해야 한다. 독자를 궁금하게 만들기보다는, 이 책을 펼치면 무엇이 있는지가 책 제목과 표지에 담긴 텍스트에 명확하게 담겨있어야 한다. 제목과 부제, 그리고 표지에 한 두줄 적힌 카피까지, 알기 쉬운 정확함이 생명이다.
또한 실용서에는 반복되는 표현이 자주 나오기 때문에 일관성과 통일성을 잘 챙겨야 한다. 당연히 띄어쓰기까지도. 그래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단어나 문장은 원고와는 별도의 문서에 정리를 해둔다. 그리고 실용서에서 제공하는 정보는 독자가 읽고 따라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친절함도 필요하다. 그 독자가 누구냐에 따라서 문장의 톤이나 어미도 달라야 하고(이건 작가가 챙길 몫이긴 하다). 게다가 앞서 말했듯, 실용서는 한정된 통일된 크기의 공간에 정보를 담는 경우가 많아서 텍스트를 어떻게 축약할지도 중요하다.
그런 맥락에서 작은 화면과 버튼에 담긴 텍스트를 책임지는 UX라이터의 고충을 이해한다. 사용자가 알기 쉬워야 하고, 명확하고 심지어 간결해야 하는! 물론 책과 화면은 달라서, UX라이팅이 전혀 다른 분야라는 건 안다. 하지만 '반응형이라서 작은 디바이스에서는 이 텍스트 두 줄로 떨어질 거 같은데 더 짧게 안되나?', '여기 텍스트는 12자로 제한할까?' 같은 고민을 할 때면, 실용서를 만들던 때가 슬금슬금 떠오르는 건 어쩔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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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용서를 만드는 모든 사람들의 경험이 나와 같지 않을 수 있다. 경험 많은 프로덕트 디자이너들에게는 당연할 이야기일테고.
그럼에도, 그 경험 많은 사람들도 이전 업무에서 배운 걸 바탕으로 다음 프로젝트로 나아간다고 생각한다. 과거 경험이 정답은 될 수 없지만, 앞으로 나아갈 디딤돌이 되는 건 분명하다.